[방민준의 골프세상] 골프하면서 ‘레테의 강물’을 마실 수 있다면

▲사진은 칼럼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AFPBBNews = News1

아름다운 샷은 빈 마음에서 나온다. 힘찬 샷이 힘이 빠진 상태에서의 부드러운 동작에서 나오듯 아름다운 샷은 투명에 가까울 만큼 마음이 비었을 때 저절로 만들어진다.

“오늘은 잘 해봐야지!” “저 친구한테는 지지 말아야지!” “지난번 참패를 설욕해야지!” “오늘은 기어코 90대를 깨야지!” 등의 각오로 잔뜩 욕심에 차서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면 어김없이 쓴맛을 보게 되는 게 골프다.

골프에서 욕심만이 만병의 근원은 아니다. 욕심 대신 다른 잡념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라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스스로 감탄이 나올 정도의 멋지고 아름다운 샷은 우연히 나오기 마련이다. 아무 생각 없이 툭 쳤는데 볼은 경쾌한 타구음을 내며 멋진 포물선을 그린다. 작심하고 쳐서 흡족한 샷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은 욕심이나 전의(戰意)는 물론 좋고 나쁜 기억까지도 없는 상태다. 적어도 샷을 하는 순간만은 무념무상(無念無想)에 가까워야 아름다운 샷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전 홀의 버디 퍼팅이나 기막힌 벙커 샷은 물론 악몽의 3퍼트나 연속 OB도 마음에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샷 하는 순간에는 지난 홀의 좋았던 일은 비슷한 결과를 바라는 욕심이나 요행심을 깃들게 하고 나빴던 기억은 강박관념과 전의로 불탄다.

낙천가에다 심한 건망증이 있다면 아마 천부적인 골퍼의 자질은 갖춘 셈이다. 부단한 육체의 훈련을 감내할 수 있는 인내심도 이보다 더 골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골프장에서 일상사를 잊고 골프에 몰두하듯이, 골프를 하면서 골프를 잊어버린다면 아마 최고의 경지가 아닐까.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가능한 한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점에서 골프는 확실히 망각의 게임이다.

그리스 신화에 이승에서 저승(하데스)으로 갈 때 건너야 하는 5개의 강이 있다. 아케론(Acheron), 코퀴토스(Cocytus), 플레게톤(Phlegethon), 레테(Lethe), 스틱스(Styx)다. 이승을 하직하는 인간의 슬픔과 비통함, 탄식과 비탄, 이를 태워 정화하는 불, 모든 것을 잊는 망각,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각각 상징한다.

망자(亡者)는 명계(冥界)로 가면서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씩 마시며 과거의 모든 기억과 전생의 번뇌도 잊는다고 한다.

골프에서도 누가 얼마나 지난 홀의 결과를 빨리 잊고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라운드의 품질이 좌우된다,

호주의 백상어 그렉 노먼은 당대 최고의 골퍼 중 한 사람이다. 그가 공저로 지은 ‘INSTANT LESSONS- ONE HUNDRED WAYS TO SHAVE STROKES OFF YOUR GOLF GAME’이라는 골프 교습서가 있다.

이 교습서에서 노먼은 골프를 잘 칠 수 있는 비결, 즉 스코어를 줄일 수 있는 비결을 소개하는데 특히 마지막 100번째 레슨이 백미다.

100번째 레슨의 제목은 ‘모든 것을 털어 버려라’다. 요지는 그동안 가르친 비결들은 물론 골프와 관련된 악몽들을 모두 잊으라고 강조한다. 골프의 진수를 터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노먼은 실토한다. “우리는 모두 골프를 사랑하지만 골프는 항상 우리가 사랑하는 만큼의 사랑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얄궂은 운명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결코 나의 승리를 가로막았던 래리 마이즈나 밥 트웨이, 로버트 가메즈, 데이비드 프로스트의 망령이나 그들의 기적 같은 샷에 대한 악몽을 완전히 털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배운 것은 골프에는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노먼은 이어 이렇게 당부한다. “여러분은 이기는 것보다는 패배하는 경우가 더 많다. 당신이 주말골퍼라면 좋은 샷보다는 나쁜 샷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털어 버려라. 잠시 옆으로 물러나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아라. 그리곤 그동안 일어난 모든 저주스러운 것들을 잊어라. 골프코스에서 분노나 자기연민을 위한 피난처는 없다. 당신이 가능한 한 빨리 평정과 결단을 되찾을수록 좋은 샷이 빨리 되살아난다.”

추락은 언제나 있다. 아무리 탁월한 기량을 갖춘 골퍼라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참하게 무너지는 게 골프다. 도저히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사소한 미풍에 마음의 평정을 잃고 혼미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골퍼는 추락하면서도 살아남는다.

노먼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추락의 순간, 모든 것을 털어 버리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마치 악몽을 꾸다가 꿈에서 깨어나 안도의 숨을 몰아쉬듯.”

라운드를 하면서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씩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