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프로골퍼는 무엇으로 사는가?…LPGA투어 선수들을 중심으로 한 고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활약하는 전인지 프로(사진제공=페어라이어). 최나연 프로(사진출처=최나연의 인스타그램)

기적 같은 퍼팅을 성공시킨 뒤 싱글벙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으로 키스를 날리는 김세영(28), 사소한 성공에도 과장된 제스처로 모델처럼 당당하게 걷는 장하나(28), 만족한 샷을 날린 뒤 하얀 이를 드러내고 해맑게 웃는 대니얼 강(28·한국이름 강효림), 멋진 티샷이나 어려운 퍼팅을 끝낸 뒤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배에 손을 대고 갤러리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김아림(25), 뜻대로 경기를 마무리한 뒤 여왕을 연상케 하는 우아한 미소를 선사하는 전인지(26), 불가능해 보이는 퍼팅을 성공한 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륵보살 같은 담담한 미소를 보이는 박인비(32), 기회 있을 때마다 동반자나 갤러리를 향해 합장으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태국의 모리아 주타누간(26) 아리아 주타누간(25) 자매, 중요한 순간 실수를 하고도 미소로 대신하는 리디아 고(23)나 이민지(24).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자존적(自尊的) 철학을 갖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프로골퍼들이 골프를 직업으로 선택한 동기나 계기는 다양할 것이다. 어릴 때 뚜렷한 목표나 갈망 없이 단지 작은 호기심으로, 주위의 또래들이 하는 것을 보고, 혹은 박수갈채를 받는 성공한 선수를 보고, 부모나 선배 또는 선생님의 권유로 어떤 스포츠를 시작하지만 10대를 벗어날 무렵 선택한 스포츠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방향 전환을 할 것인가 기로를 만난다.

이때 기준은 대부분 세속적 실존(實存)이다. 밥벌이는 할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는가에서 출발해 얼마나 유명해질 수 있는가, 인기는 얼마나 얻을 수 있는가 등이 방향지시등이 된다.

불행하게도 많은 선수들이 세속적 실존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승 한번 못해 보고 스러지거나 반짝 빛을 발하는 듯하다 잊혀지기 일쑤다.

자기 존재에 대한 철학 부재(不在) 탓이다. 어떤 길을 택하든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성공하려면 뚜렷한 자기만의 철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한 분야의 길을 끝까지 가려면 남이 아닌 자신의 선택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 1차 기준은 즐거움이다. 즐거움이 없는 길이라면 성공을 기대하기 힘들고 성공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한다. 이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감이 있어야 한다. 혹독한 훈련으로 선수로 성공했다고 해도 스스로 만족감이나 성취감, 희열 같은 것이 없다면 언제 중도에 포기할지 모른다.

즐거움에 더해 자기만족을 할 수 있다면 자신이 선택한 스포츠를 계속할 수 있는 중요한 모티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길에 매진하게 하는 최고의 동기는 보람이다. 보람이란 자기만족을 초월해 나로 인해 누군가에도 도움을 주는 데서 얻을 수 있다.
스포츠선수로서 ‘즐거움 → 자기만족 → 보람’의 이상적 선순환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예가 최경주다. 생존을 위해 골프를 시작했으나 혼신의 노력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단계에 도달해 이제는 자아성취와 함께 기부와 자선, 봉사에서 보람을 찾는 멋진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2021시즌 개막전 ‘다이아몬드 리조트 챔피언스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한 제시카 코다. 사진제공=Getty Images

지난 25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레이크 부에나 비스타의 포시즌 골프 & 스포츠클럽 올랜도(파71)에서 막을 내린 LPGA투어 2021시즌 개막전 다이아몬드 리조트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에서 제시카 코다(28)가 연장전 끝에 재미교포 대니얼 강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라운드부터 선두에 나서 2타 차 선두로 마지막 라운드를 맞은 대니얼 강은 4라운드 15번 홀에서 보기를 하며 이날 하루 5타를 줄인 제시카 코다와 동타를 이뤄 연장 첫 홀에서 버디를 한 코다에게 우승을 내줬다.

2012년 호주여자오픈에서 LPGA투어 데뷔 첫 승을 올린 코다는 2018년 혼다 타일랜드 대회에서 5승을 달성한 이후 약 3년 만에 승수를 추가했다. 지난해 2승을 올린 대니얼 강은 LPGA투어 통산 6승의 문턱에서 멈췄다.

승패를 떠나 대니얼 강과 제시카 코다의 경기는 보기 드문 명승부였다. 특히 경기에 임한 두 선수의 자세는 스포츠에 왜 자기만의 철학이 필요한가를 보여주었다.

대니얼 강의 오른쪽 손등에는 ‘아빠’ ‘just be’라는 작은 문신이 새겨져 있다.

부산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 권유로 태권도, 골프와 인연을 맺으며 자연스럽게 아버지로부터 삶의 철학을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있는 그대로 네가 되어라’라는 의미로 ‘just be’를 강조했다고 한다.

딸을 골프선수로 대성시키려는 보통 아버지라면 끊임없는 연습을 입버릇처럼 주문하며 체력 단련, 도전 정신, 승부 근성 등을 강조해왔을 터인데 어릴 때부터 ‘just be’라는 철학적 화두를 주었다니 부녀관계가 범상치 않았던 모양이다. 보통 아버지와 딸 사이에서 전수되기 힘든 철학이 느껴진다.

2010년, 2011년 연속 US 여자 아마추어챔피언십에 오르며 차세대 스타로 점지된 그는 2011년 LPGA투어 Q스쿨을 거쳐 조건부 출전자격으로 2012년부터 LPGA투어에 뛰어들었으나 킹스밀 챔피언십 공동 3위를 빼면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2013년 말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 아픔이 컸다. 이때 ‘just be’ 외에 아버지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 ‘아빠’라는 문신을 더했다. 우승 없이 7년여를 보낸 다니엘 강이 2017년 4차례 톱10에 든 데 이어 데뷔 첫 우승을 메이저 대회(KPMG 위민스 PGA챔피언십)에서 거두고 이후 매년 즐겁게 승수를 보탤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가 전해준 ‘just be’에 담긴 지혜를 실천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제시카 코다와 넬리 코다(23) 자매가 경기하는 자세 역시 남다르다. 경기 자체를 즐기고 미스샷을 낸 뒤에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명랑 활달하고 주위와 활발히 소통하며 결코 미소를 잃지 않는다. 자매간에 경쟁심리가 있지만 경쟁 자체를 즐길 줄 안다. 부모의 훌륭한 스포츠 DNA를 물려받은 것 같다.

코다 자매의 아버지 페트로 코다와 어머니 레지나 라크로토바는 체코 출신의 테니스 스타다. 아버지는 1992년 프랑스오픈 단식에서 준우승, 1998년 호주오픈에서 우승했고 어머니는 세계랭킹이 26위까지 올라갔었다. 막내 동생 세바스찬 코다(21)도 테니스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체코 이민자답게 ‘맥주를 물 마시듯 한다’는 코다 가족은 자연스레 스포츠를 즐기고 스포츠에서 자아성취와 보람을 찾는데 익숙할 것은 당연하다. 이번 대회에서 동생 넬리 코다는 22언더파 262타를 쳐 3위에 올랐다.

야구선수 출신 데릭 로우, 배우 채드 파이퍼와 함께 4라운드를 돈 전인지는 최종합계 17언더파 267타로 4위에 올랐다. 지난해 8월 메이저 대회 AIG 여자오픈 공동 7위에 이어 5개월 만에 톱10에 들며 상승기류를 타 부활을 예고했다. 우아한 아름다움에 갇혀 부족했던 승부 근성이나 집념을 더 활성화시키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뒤따랐다.

LPGA투어에서 청 야니(32·대만)와 최나연(33)은 불가사의한 선수로 자주 입에 오른다.

2008년 LPGA투어에 혜성처럼 등장해 데뷔 첫해에 메이저인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2012년까지 5년간 메이저 5승을 포함해 LPGA투어 통산 15승을 거둔 청야니는 아니카 소렌스탐처럼 은퇴하기 전까지 LPGA투어를 호령할 것으로 보였다. 그런 그가 2012년 3승을 거둔 뒤 지금까지 승수를 보태기는커녕 존재 자체가 잊혀지고 있다.

2008년 LPGA투어에 데뷔한 최나연 역시 2015년까지 메이저 1승을 포함해 9승을 올리며 승승장구하다 6년 가까이 승수 추가는 고사하고 리더보드 중위권에조차 이름을 찾기 어렵다.

청 야니나 최나연만큼 깊은 늪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화려하게 LPGA투어에 데뷔한 박성현(27), 김효주(25) 역시 부진의 터널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느낌이다.

박성현은 2017년 LPGA투어에 데뷔하자마자 신인상과 상금왕, 올해의 선수상을 독차지하며 절대강자로 부상했으나 2019년 2승 이후 7승(메이저 2승)에 머물고 있다. 비회원으로 메이저인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2015년 LPGA투어에 뛰어든 김효주도 2016년 이후 3승에 머물고 있다.

박성현이나 김효주의 경우 우승만 못 할 뿐 꾸준히 중상위권에 이름을 올려 부활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청 야니와 최나연은 답답하다. 본인은 물론 전문가들도 그 원인과 돌파구를 찾으려 애쓰지만 여전히 길을 못 찾고 있다.

최나연이 LPGA투어에 복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 전인 지난 연말 평소 다니던 헬스클럽에서 ‘바디 프로필’을 찍어 화제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멤버인 최나연 프로. 사진출처=최나연의 인스타그램

바디 프로필은 젊은 시절 아름다운 몸매를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말한다. 모델이나 연예인, 보디빌더 등이 주로 찍었으나 최근에는 운동을 즐기는 일반인 사이에서도 유행이라고 한다.

“근육이 아주 잘 나오니 한번 찍어보자”는 헬스클럽 트레이너의 꼬임에 넘어가 7㎏이나 감량하며 촬영에 임했다는 그는 자신의 몸매와 사진에 만족을 표하며 유튜브에도 공개했다.
그동안 운동에 방해가 된다며 치마를 입지 않고, 머리도 단발을 고집해온 그로선 고치를 찢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한때 PGA투어 및 LPGA투어 선수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가장 이상적인 스윙을 가진 선수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1위에 올랐던 최나연이 바디 프로필 촬영을 계기로 삶의 이정표를 찾고 부활의 동력(動力)을 얻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