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존 람의 US오픈 우승, 그리고 ‘잡식성 골퍼’에 대한 小考

▲2021년 미국프로골프(PGA) 메이저 골프대회 제121회 US오픈 우승을 차지한 존 람이 우승컵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제공=USGA/Jeff Haynes

사자나 호랑이가 아프리카 초원이나 아시아 밀림의 최상위 포식자이긴 하지만 먹이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생존 자체를 위협받기도 한다. 정상적으로 먹이사슬이 형성된 환경에서는 서로 먹고 먹히면서 생존하지만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 급격한 기후변화 등으로 먹이사슬이 붕괴되었을 때 육식을 하는 최상위 포식자는 가장 취약하다. 초식동물도 먹을 풀이 없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이때는 육식동물이나 초식동물이 아닌 이것저것 다 먹을 수 있는 잡식성 동물의 경쟁력이 돋보인다. 식물의 잎이나 뿌리, 줄기, 열매, 벌레 등을 먹을 수 있으니 그만큼 생존 확률이 높다. 유인원, 여우, 들쥐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인간이 지구별의 최상위 포식자가 된 것도 잡식을 하며 어떤 조건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골프에서도 필드의 최강자, 동물 세계의 용어로 최상위 포식자는 누구일까.

드라이브 샷을 정확히 멀리 날리는 사람, 섬세한 아이언샷을 터득한 사람, 어프로치에 능한 사람, 3퍼팅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 등 제각기 특장을 갖고 있지만 누구도 어느 한두 부문에 능숙하다고 골프의 최상위 포식자가 될 수는 없다.

이것도 저것도 잘하는 골퍼.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이것도 저것도 처리해낼 수 있는 골퍼가 필드의 포식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멋진 드라이브샷을 자랑하는 사람이 짧은 드라이브샷에 정확한 아이언샷을 날리는 사람에게 발목이 잡히는 경우도 흔하다. 어떤 사람은 정교한 어프로치나 퍼팅만으로 골프의 정글에서 도태되지 않고 버티기도 한다.
어느 한두 가지를 잘 해도 버틸 수 있지만 특정한 특기는 없지만 이것 저것을 적당히 할 수 있는 이른바 잡식성 골퍼의 경쟁력은 의외로 강하다.

▲2021년 미국프로골프(PGA) 메이저 골프대회 제121회 US오픈 우승을 차지한 존 람이 최종라운드에서 경기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USGA/Chris Keane

존 람(26·스페인)이 21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토리파인즈GC 남코스(파71)에서 열린 제121회 US오픈 최종 라운드에서 버디 5개에 보기는 1개로 4타를 줄여 합계 6언더파 278타로 루이 우스트히즌(38·남아공)을 1타 차로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메이저 정상은 처음이고 PGA 통산 6승째다. 스페인 선수 최초의 US오픈 우승자라는 영광도 안았다.

이달 초 열린 메모리얼 토너먼트에서 3라운드까지 6타 차 선두를 달리다가 코로나 확진 판정으로 기권, 자가격리를 거쳐 음성 판정을 받고 간신히 이번 대회에 출전한 람은 놓친 고기보다 더 큰 대어를 낚았다.

그는 16번 홀까지 우스트히즌에 1타 뒤진 2위로 끌려가다 17, 18번 홀에서 잇달아 어려운 버디 퍼팅을 성공시키며 우스트히즌에 1타 앞선 단독선두로 경기를 마쳤다.
몇 번의 위기를 넘긴 우스트히즌은 17번 홀에서 티샷이 왼쪽 페널티 구역으로 날아가 위기를 맞았다. 파 세이브에 실패한 그는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잡았으나 1타 차를 좁히지 못했다.

▲2021년 미국프로골프(PGA) 메이저 골프대회 제121회 US오픈에서 우승 경쟁한 끝에 준우승한 루이 우스트히즌이 최종라운드 18번홀에서 경기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USGA/Darren Carroll

내 눈길을 끈 것은 끝까지 우승을 놓고 경쟁을 벌인 존 람과 우스트히즌을 비롯, 리더보드 상단을 점령한 선수들이 어느 한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골고루 잘하는 이른바 ‘잡식성 골퍼’들이란 사실이었다.

존 람의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는 307.6야드로 PGA투어 선수 중 21위, 페어웨이 안착률은 63.11%로 58위, 그린 적중률은 71.04%로 5위, 샌드세이브는 69.60%로 81위로 그린 적중률을 제외하고 뛰어나다고 할 수 없지만 18홀 평균 스코어는 69.602%로 1위다.

준우승한 루이 우스트히즌도 평균 드라이브 비거리는 296.9야드로 104위, 페이웨이 안착률은 62.90%로 63위, 그린 적중률은 66.15%로 58위로 중위권 이하이지만 평균 스코어는 69.842타로 4위에 올라있다.

이밖에 3위 해리스 잉글리시, 공동 4위 콜린 모리카와, 브룩스 켑카, 공동 7위 대니얼 버거, 브랜든 그레이스, 폴 케이시, 잰더 쇼플리, 로리 매킬로이, 공동 13위 프란체스코 몰리나리, 러셀 헨리 등 상위권자들의 면모를 보면 어느 한 부분에 특출하기보다는 골고루 잘하는 ‘잡식성 골퍼’들이다.

거포를 주무기로 하는 브라이슨 디섐보나 더스틴 존슨이 각각 공동 26위, 공동 19위로 밀린 것은 ‘잡식성 골퍼’의 경쟁력을 설명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2021년 DB그룹 제35회 한국여자오픈 골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박민지 프로가 우승을 차지했다. 사진제공=SBS골프

박민지와 박현경이 명승부를 펼친 KLPGA투어 메이저인 DB그룹 한국여자오픈에 출전한 선수들이 대거 기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라운드에서 1명, 2라운드에선 무려 14명이 기권했다.
원인은 대회가 열린 레인보우 힐스GC(파72, 6763야드)가 너무 어려워 체력적으로 버텨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2008년에 개장한 레인보우 힐스GC는 세계적인 골프코스 디자이너 로버트 트렌스 존스의 큰아들인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가 설계한 코스로 설계자 스스로 걸작으로 꼽는 산악형 코스다. 자연을 최대한 해치지 않는다는 설계가의 철학이 반영된 코스라 업다운이 심하고 페어웨이도 좁고 페널티 구역도 많다. 산악 지형인 만큼 체력소모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코스가 아무리 난이도가 높고 체력을 요한다 해도 15명이나 기권했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 골프코스가 얼마나 변별력 없는 평이한 코스인가를 반증한다.

한국의 골프코스는 일반 내장객을 많이 소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코스를 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페어웨이는 넓고 지나친 해저드 설치를 꺼리고 러프도 그다지 길지 않게 관리한다.

LPGA투어에 처음 진출한 한국선수들이 초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한국 코스에 익숙해 페어웨이가 좁고 러프가 길고, 해저드가 많고, 그린의 굴곡이 심한 미국 코스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어떤 코스 어떤 악천후에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잡식성 골퍼의 미덕이 아닐까.